한동안 블로그에 포스팅을 하지 못했다. 보통 '못했다.'라는 표현은 '안했다.'라는 표현의 핑계적 수사에 불과한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이번 경우엔 정말로 못했다.(라고 쓰고보니 오히려 더 핑계처럼 들리지만.) 왜 포스팅을 하지 못했는지는 당신도 시대의 공기를 호흡하고 있다면 모르지 않을 것이다. 행동하지 않는 자에게 발언권은 없다.
쌈넷 사무실에 일이 있어 갔다 백현진의 '반성의 시간' 시디를 받아왔다. 집에서 술을 마시며 찬찬히 자신의 이십대를 회한하는 그의 목소리를 들었다. 아니 그의 목소리가 술을 불렀다. 앨범은 국민학교 때 골목에서 양복을 입은 아저씨가 '대한민국 국민학생 70%의 장래희망이 과학자'라는 통계를 들어가며 팔던 1000원짜리 현미경 겸용 망원경을 생각나게 했다. 비록 그 현미경 겸용 망원경은 내 일주일치 용돈을 털어가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지지 못하고 곧 장난감 박스속에 처박혔지만, 이십대 후반에 만난 현미경 겸용 망원경으로 본 세상은 너무도 선명해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조금 부끄러웠다. 이미 그에게 지나버린, 이렇게 기록하는 것으로 밖에 남길 수 없는 이십대를, 아직 온전히 온 몸으로 겪고 있는 내가 갈취한것 같아서. 조만간 레코드점에 들러 음반을 사야겠다. 무엇보다 지금 이 시대에 온전히 '앨범'으로 갖고 싶은 음반을 만난다는 건 첫사랑을 다시 앓는 것 같은 축복이니까.
수요일, 캠프에서 사랑니 발치 수술을 받은 우영형과 정말 오랜만에 술을 마시지 않고 얘기를 나누었다. 우영형은 지난 단계를 끝내고 새로운 단계로 나아가는 것에 대한 얘기를 해주었다. 오늘은 폐업한 여대생 다방의 물건을 옮기기 위해 안데스의 집에 갔다. 창문식으로 되어있는 커다란 문 두겹을 떼어내야 물건을 옮길 수 있는데 문이 빽빽하게 걸려 잘 빠지지 않았다. 끼인 문을 보며 우영형에게 들은 얘기를 다시 떠올렸다. 다시 한번 이 표현을 쓰자면 돌아가지 않는 회전문에 끼인 기분이 들었다. 가만히 앉아 빠지지 않는 문을 골똘히 바라봤다. 몇번 힘을 준 끝에 문은 결국 빠졌다.
이별은 했지만 정리는 하지 못했다. 매일같이 집에서 혼자 술을 마셨다. 집회는 나가지 않고 매일 새벽 시위 중계를 봤다. 또 혼자 술을 마셨다. 그렇게 한달을, 한주를 보냈다. 음악은 거의 듣지 않고 책은 읽지 않았다. 담배를 다시 피웠고 dance & humor creator인 주제에 몸은 움직이지 않았고 그럴듯한 유머도 만들어내지 못했다. 만약 언젠가 2008년 5월을 기록한다면 그 기록은 술병의 갯수와 '누드 사진'으로 검색된 리퍼러 수가 될 것이다.
땅만 바라보며 길을 걷다 돈을 주운 것처럼 며칠 사이 새로운 일을 제안 받았고, 새로운 일을 제안하게 됐다. 가지 않는 시간을 원망하며 붙잡고 있던 5월도 기어코 지나고 곧 6월이 찾아온다. 지금 단계를 마무리 하고 다음 단계로 나아갈 시간이다. '다시 그 시간 속으로 들어갈 순 없'을테니. 우선은 토요일 시청 앞 광장에서 촛불을 밝혀야겠다.
어떻해야 만날 수 있나
어떻해야 만날 수 있나
그 많았던 시간들이 불에 타는걸
난 침대에 누워서 지켜보았지
당신은 천장에 매달려서 춤추고
나는 베개에 얼굴을 묻고 꿈꾸네
그 시간 속에
그 시간 속에
그 시간 속에
그 시간들
어찌하여 이지경이 됐나
계단에 앉아서 당신을 기다렸던
97년 초여름의 빛나던 시간
딸린으로 가는 배의 2층 침대에서
당신에 관한 노래를 부르다 울었네
어떻해야 잊을 수 있나
어떻해야 잊을 수 있나
어떻해야 잊을 수 있나
어떻게해야 당신을 잊을 수 있나
다시 그 시간 속으로 들어갈 순 없겠지
다시 그 시간 속으로 들어가 순 없겠지
당신과의 그 시간들
당신과 나눴던 사랑
당신의 무릎베개에서
눈을 감고 귀를 파며 나는 꿈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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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앨범, 술을 부른다는 말이 딱입니다. 전 '학수고대 했던 날'이 제일 좋더군요. 아는 선배가 앨범 리뷰를 좀 길게 쓴 게 있었어요. 수컷과 도시의 이미지라고 하길래, 저는 수컷에 동의 못하지만 도시 이미지는 맞다고 이야길 했었어요. 도시도 강북의 뒷골목 쯤이라고 할까요. 뭔가 이 살진 남녀가 형광등 아래서 옷을 벗고 뒹굴어야 할 것 같았어요. 알콜 때문에 깨지는 머리를 붙들고요. (아무래도 뮤직비디오 때문에 그렇게 생각한 듯.)
개인적으로 이효리 대신 백현진이 노래를 부르며 소주 광고를 하면 어떨까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이 앨범의 비교 대상은 아쉽게도 국내 음악 중엔 없고, 영화 중엔 홍상수의 영화가 될 것 같아요. (실제로 이러한 지적이 몇번 있기도 했지요.) 살진 남녀가 (덧붙인다면 허름한 여관의) 형광등 아래서 옷을 벗고 뒹굴어야 할 것 같은 날것 그대로의 이미지. 뮤직비디오는 백현진씨가 출연한 단편영화의 ng 컷을 갔다 썼다고 하는군요.
내가 그날 무슨 얘기했지. 나도 정상이 아닌데 괜한 말을 한 건 아닌지 모르겠구나. ㅎ
아니 술 안마시고 얘기한 것도 기억을 못하면 평소에 술마시고 얘기하는 것들은 대체..